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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VS 카이사르

by 꾸깃쿠크 2023.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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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점

 

 

1.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 모두 용맹한 전사였다.

2.전쟁을 탁월하게 치러냈다.

3.명문가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웅변에 뛰어났으며, 너그러웠다.

4.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는 온건한 성품을 타고났으며, 막료와 시종들을 몹시 아꼈고, 자기 군대의 장군과 사병들을 조직하여 충성을 받았고, 적군에게 자비로웠다.

5.그들의 용맹은 젊은 시절부터 촉망을 받았으며, 그들의 전과는 모두 찬란했다.

6.그들이 치른 전쟁이 짧게 끝났다는 점과 그들이 거쳐 간 나라의 영토가 광대하다

7.자신들이 멸망시킨 적군과 자신들이 정복한 도시와 지방을 현명하게 처리했다.

8.지혜와 용맹을 발휘하면서 늘 자신들의 손으로 승리를 쟁취한 그들은 남들의 질투를 불러일으킬 여지를 주지 않았다.

9.그들의 용맹함은 그들이 가고자 하는 앞날에 오직 도움만을 주었다.

10.개인적으로 엄청난 위험을 겪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6년에 아제르바이잔의 말리에서 싸우면서 위험한 고비를 넘겼고, 카이사르는 스페인에서 폼페이우스의 아들과 싸우면서 그런 일을 겪었다.

 

 

차이

 

귀도 레니 술마시는 바쿠스

 

알렉산드로스는 젊은 날에는 방탕하고 나약하였으나 일생을 망칠 정도는 아니었고, 장성한 뒤부터는 여성에 대해 자제력을 보여 주었으며 방종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와 달리 카이사르는 망신스러운 꼴을 겪었고, 그것이 그의 허물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기 앞에 나타난 여인들을 처음보는 여인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여자 문제에서 자신의 분수를 지키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드로스는 덕망을 쌓으려고 위대한 제왕의 길을 걸어가다 보니 어느 날 세상의 명예를 얻었으며, 모든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학식이 높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모심으로써 자신이 그의 가장 소중한 제자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배움으로써 덕망을 닦은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재능과 그 시대의 전제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돌파해 나갔다. 그는 아집과 야망이라는 용서받을 수 없는 악덕에 사로잡혀 끝내는 그 때문에 목숨까지 잃었는데, 이는 시대가 카이사르 자신과 조국에 불행한 시기였음을 뜻한다.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는 아리스토텔레스, 프랑스 화가 Charles Laplante 1867-1900작

 

알렉산드로스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사랑하고 위대한 학자를 존경함으로써 어떤 다른 군주보다도 더 자신을 훌륭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카이사르는 자기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만약 그가 다른 사람을 배려한 적이 있거나 금은을 넉넉히 준 적이 있었다면, 이는 그 사람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함이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자르는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드로스는 현자다웠는데 몇 가지 실수를 하기는 했어도 당대의 수많은 유명 작가들이 알렉산드로스에게서 교훈적이고도 짤막한 경구들을 수없이 얻어다 기록해 놓았다. 그에 견주어 보면 카이사르는 조국을 지배하려고 끝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자신의 삶을 얼룩지게 했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출처:위키백과)

 

아버지인 필리포스왕의 금고가 비고 빚이 더욱 늘어갈 때 알렉산드로스는 갓 성인이 된 나이에 즉위했다. 그는 전쟁을 벌이는 곳에서 군수품을 보급받았는데, 이 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여 얻은 전리품으로 자신의 부대를 무장했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와 달랐다. 카이사르는 오랫동안 전쟁 물자를 준비했으며, 다행히도 자신의 빚을 갚아 줄 크라수스를 만났으나 이 만남은 끝내 로마를 부패하게 했다.

 

알렉산드로스에게 무릎을 꿇는 다리우스 가족

 

알렉산드로스는 위대한 군주로서 개전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질 때만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공덕을 이루는 일이 아니라면 남을 공격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가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온 나라를 불길과 눈물로 가득 채웠다.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절친 히파이스티온,

안드레어 카마세이(Andrea Camassei, 1602~1649) 1602년 작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병사들에게 충성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스의 부하들 가운데 질서를 문란하게 만드는 무리는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막료의 도움을 받아 야만족들조차도 문명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자신의 막료를 방종하게 버려두었으며, 그들은 끝내 카이사르를 저버렸다. 그는 무례한 무리로 로마를 가득 채우고, 끊임없이 혼란의 씨를 뿌림으로써 끝내 스스로를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배신자나 반역자를 용서하지도 않았지만, 명예를 위한 일이 아니면 그들을 정복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개인적인 이유로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 그들이 자기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응징한 것이다.

 

알레산드로스는 자기 일을 처리하면서 열망과 불굴의 용맹을 보여 주었으며, 어떤 위험에 빠져도 마음을 나약하게 먹지 않았다. 그런 점에 견주어 본다면 카이사르는 많은 일을 이기적으로 처리했다.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막료였던 헤파이스티온 장군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코사이오이족을 끔찍하게 죽였다. 이는 아무리 해도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실수였던 반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몰락하면서 자신의 입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이집트로 진격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와 디오게네스

 

알렉산드로스는 일상에서 매우 자비로웠다. 자신의 사려 깊지 않은 행위로 말미암아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는 연고를 발라 주듯이 쓰다듬어 주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슬퍼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가슴속에 알 수 없는 증오를 숨기고 있었는데, 그 증오는 때와 상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또한 카이사르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전후에는 몇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었는데, 이 역시 자신의 입신을 위한 것이었지 그들에게 호의를 품어서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카이사르는 죽은 노예와 막료에게 호의를 보였는데 카이사르의 행동은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데가 있었다.

 

안니발레 카라치 디오니소스의 승리

 

알렉산드로스는 술이 지나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평화로울 때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를 빛나게 해 준 수많은 미덕을 묻어 버릴 수는 없다. 그와 달리 카이사르는 쾌락을 자제하지 못했고, 야망에 끝이 없었다.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고 위험하여, 알렉산드로스가 불같이 화를 내고 술이 지나친 것과는 견줄 수가 없다.

 

빈첸초 카무치니의 '카이사르의 죽음'

 

알렉산드로스의 영광은 순수하고 흠이 없어, 전성기에도 시샘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영광은 평소처럼 이어져 그리스와 유럽의 군인들이 모두 그를 애도했다. 카이사르도 알게 모르게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극복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은 부끄러운 영광뿐이었다. 그는 제국의 지배자들에게 증오만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짧은 시간에 몰락했으며, 좋은 법과 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세상을 내란의 소용돌이로 몰아 넣었고, 그의 권력은 그의 조카 아우구스투스에게 넘어갔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흉상

 

알렉산드로스는 급박하게 필요한 때가 아니면 지나치게 앞서 나가지 않았는데 카이사르는 마지막 날까지 싸우면서 자기 부대의 가장 낮은 병졸처럼 거침없이 몸뚱이를 던졌고 다치지도 않았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보다 더 훌륭하게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했고, 격류처럼 위험에 몸을 던져 닥쳐오는 것들에 냉정하게 맞섰다.

 

알렉산드로스가 겪은 위험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카이사르가 겪은 위험을 더 높이 평가한다. 갈리아족과 폼페이우스의 부하들처럼 용맹한 적군이 수없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갈리아부족)

알렉산드로스는 늘 정의를 따랐고 그 태도는 모나지 않고 정중했으며, 승리를 거두어도 겸손했고,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면서 지혜롭고 신중했다. 카이사르의 지난날은 매우 힘겨웠다. 그는 정계에 들어가 정무를 다루기 시작한 뒤로 열정을 다했으며, 여흥을 즐긴 일이 없고, 막료나 가까운 사람들과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비뚤어지지 않고, 전쟁에 임할 때는 나름의 정의에 따랐다. 그는 자신에게 맞서려는 자들을 쓰러뜨림으로써 불필요한 전쟁의 싹을 없애 버린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는 적군에게는 너그러웠다.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명예를 오래 남기고 싶은 마음에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 댔지만 카이사르는 떠드는 대신에 열정을 가지고 일했으며,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해냈다.

 

카이사르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보다 더 나이가 많았고 야위었으며 왜소했고 간질을 앓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게으르게 산 것은 아니었다. 그는 늘 몸을 단련함으로써 육체적 약점과 싸우며 몸을 튼튼히 만들었는데, 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바르고 부지러한 삶을 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로마군의 브리튼섬 상륙을 묘사한 삽화

 

카이사르의 여행과 전투와 정복과 원정을 알렉산드로스와 견주어 보자. 알렉산드로스에 견주어 카이사르가 거둔 전과가 훨씬 더 많다. 갈리아족과 벌인 전투만 하더라도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와 인도에서 치른 정복 전쟁을 합친 것보다 더 위험했다. 카이사르의 원정은 경비가 허술한 강이나 산을 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벌인 싸움이었으며, 교활하고 강력한 적군을 무찌르는 일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전쟁보다는 타협에 따른 승리를 더 좋아했다.

 

카이사르는 너무 많은 승리와 개선식을 치르느라 쉴 틈이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지막으로 앓았던 때와 죽기 얼마 앞서까지 대양을 오르내리며 항해했지만, 카이사르는 말년에 오히려 지난날보다 더 많은 전쟁을 치렀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그의 장군들과 후계자들은 욕망에 사로잡혀 오랫동안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온갖 어려움 끝에 세계를 정복하고 왕국을 세운 아우구스투스의 모습 속에서 살아 있었다.

 

 

 

 

플루타르코스 저, 신복룡 역, 플루타르코스 영웅전4, (주)을유문화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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