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kakaocdn.net/dn/sBCT9/btso6TKcl25/DIcKwmqJu4kqTthTDENlrk/img.jpg)
1902년 자신의 저서 <로마사>로
독일 최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테오도어 몸젠은 카이사르를 평하기를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라고 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그만큼 창조적이었고 천재적이었으며
후대에 역사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인물이었습니다.
이번 글은 방대한 양의 로마인이야기 카이사르 편을
다루기 전 짤막하게 소개 되어 있는
카이사르의 돈과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해마다 12월이 가까워지면
로마의 집정관이나 법무관 같은
국가 요직에 있는 인사들의 집에서 여자들이
보나 여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12월 1일 밤에 열리는 이 제사는
출산을 담당하는 여신에게
바쳐지는 것이어서 여인들만 참가한다고 합니다.
남자는 그 집의 가장조차도 얼씬 거릴 수 없기 때문에
제사가 열리는 집에서는 노예를 포함한 모든 남자들이 그날 밤만은 다른 집에 손님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법무관이었던 카이사르의 집에서도
제사 준비가 한창이었고
카이사르가 이혼하라는 술라의 명령도 어기고 결혼을 유지했던 전 집정관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가 죽은 뒤
후처로 맞아들인 폼페이아도 여신제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소 폼페이아를 짝사랑하던 클라우디우스라는
남성이 카이사르의 집에 몰래 숨어 듭니다.
클라우디우스는 바로 발각되고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명령에 의해
집에서 쫓겨납니다.
카이사르는 최고 제사장도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로마 종교계 최고 책임자의 관저에서
신에 대한 모독 행위가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카이사르의 반대파들은
이것은 최고 제사장의 직무 태만이며
지금까지 남의 아내를 가로채온 사나이 카이사르가
이번에는 처음으로 자기 아내를 가로채인 것 같다는 식으로 소문을 퍼뜨리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상황이 이러자 카이사르는 아내와 이혼했습니다.
이후 범인을 색출하기 위한 자리에서
그날 밤 제사에 온 불청객이 누구였는지
카이사르는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모른다고
답합니다.
그러면 왜 이혼했냐는 질문에
카이사르는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카이사르의 아내되는 여자는 의심조차도 받아서는 안됩니다."
자기는 제멋대로 놀아난 주제에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뻔뻔 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지만 당시
"세계의 패권자가 된 여러분 위에 마누라라는 또 하나의 패권자가 있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기가 드센 로마 여성을 상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카이사르에 대해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크라수스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
카이사르가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속주를 다스리러 가게 되었을 때
그가 진 빚을 갚기 전에는 로마를 떠날 수 없다며
카이사르의 채권자들이 카이사르에게 몰려 옵니다.
당시 카이사르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빚을 지고 있었고
이들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온 것도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뜻밖에도
카이사르의 최대 채권자 크라수스였습니다.
그는 빚을 갚아야할 기한을 연기해줬을 뿐만 아니라
다른 빚에 대한 보증까지 서주었습니다.
이처럼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필사적인 노력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은 두 가지 문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들에 있습니다.
그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여자 관계와 금전 문제입니다.
고금의 역사가나 연구자들은 하나같이
카이사르에게 매료되어 버리는데
이들이 카이사르에게 매료된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결코 자백하지 않지만
카이사르는 왜 그토록 여자한테 인기가 있었으며,
게다가 그 여자들 가운데 아무한테서도 원한을 사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고대 로마에서 미남의 평가 기준은
여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단정한 용모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깨물고 싶을 정도였다는 젊은 시절의 폼페이우스
보기 드문 미모로 평판이 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총애한 안티노의 초상에서 그것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결코 미남이 아닙니다.
젊은 시절부터 뺨에 주름이 깊이 새겨져 있었고
40대 후반부터는 머리가 눈에 띄게 후퇴하는 바람에
가운뎃부분의 머리카락까지 이마 쪽으로 끌어내려서
대머리를 감추느라 고심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거기에 40대까지의 그는
항성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유복할리도 없고 여자의 허영심을 채워줄 만한
권력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자라는 여자는
모두 카이사르를 좋아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자기 차례가 오기를
줄지어 기다리는 상류층 부인들을
모조리 맛보는 빛나는 영광을 누렸다고 합니다.
카이사르의 최대 채권자인 크라수스의 아내 테우토리아
남편이 오리엔트에 출정해 있던 폼페이우스의 아내 무키아
폼페이우스의 부장으로 역시 전쟁터에 나가 있던
가비니우스의 아내 로리아
원로원 의원의 3분의 1이 카이사르에게 아내를 도둑맞았다고 말하는 역사가도 있습니다.
카이사르의 애인들 중 가장 유명한 여자는
훗날의 클레오파트라를 제외하면 세르비아인데
세르비아는 훗날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가 된
브루투스의 어머니이면서
재혼을 거절해서까지 카이사르의 애인으로
남아 있기를 고집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로마의 상류층으로 오고가며
자주 마주치는 사이인데도
서로 질투하거나 싸우지도 않은 채,
자기 차례가 오기를 얌전히 기다리면서
차례로 그의 애인이 되었으니 유쾌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그는 여자라면 다 좋아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 사교계의 유명한 여성이었던
클라우디아는 애인으로 삼지 않았는데
그녀가 후에 젊은 애인이 떠난 것에 앙심을 품고
그 남자가 돈을 횡령하고 자신을 독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고발하고 키케로에 의해 패소한 적 있는 것을 생각해 볼 때그의 여성 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앞서 말했듯이 그는 여자들한테
인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원한을 품은 여자가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여자의 심리를 잘 알고 있던 것으로 보이며
그가 여성들을 상대한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랑하는 상대를 화려한 선물로 공략한 것은 여자가 아니라 카이사르였습니다.
빚이 늘어나니까 선물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여자는 아내 뿐입니다.
여자들은 값비싼 선물을 주는 남자를 사랑스럽게 여기고 자랑스러워 합니다.
카이사르가 세르빌리아에게 선물한 진주는
당시 가장 비싼 땅의 호화저택을
두채나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카이사르가 막대한 빚을 진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둘째, 카이사르는 애인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애인은 그녀들의 남편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고
자신과의 관계를 숨기지 않는 남자의 태도에
여자들은 자신이 정실이 아닌 정부에 불과하다 해도
불만스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셋째,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카이사르를 차례로 관계한 여자들 가운데
누구하고도 결정적으로 인연을 끊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무려 20년 동안이나 공공연한 애인이었던
세르빌리아의 경우
카이사르는 그녀와 관계를 끊은 뒤에도
그녀의 소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려고 애썼다고합니다.
그녀의 아들 브루투스가
폼페이우스의 편에 가담해서 자기한테 칼을 돌렸을 때도
전투가 끝난 뒤 브루투스의 안부를 걱정했고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자
당장 세르빌리아에게
그 소식을 전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클레오파트라가 공공연한 애인이 된 뒤에도
세르빌리아의 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국유지를 싸게 불하해 주는 등 공인이라면 해서는 안될 일까지 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을 세르빌리아의 아들 브루투스가 어떻게 느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입니다.
카이사르는 아내와 함께 참석한 잔치에서
옛 애인을 만나도 그녀를 모르는 척하지 않았고
당당하게 옛 애인에게 다가가 안부를 묻고는 했다고 합니다.
여자는 무시당했을 때 가장 깊은 상처를 입는 법입니다.
카이사르의 애인들은 자신을 숨기거나 무시하지 않는
카이사르의 태도에 큰 호감을 느꼇을 거라 생각됩니다.
정실인 아내도 카이사르가
다른 애인들과 동등하게 대우해 주면서
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적인 관계라는 우월감도 더해져
카이사르에게 화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금의 역사가들에게 두번째 미스테리는
왜 카이사르는 그렇게 엄청난 빚을 지었는가 입니다.
로마인이야기의 저자는
카이사르가 왜 여자에게 인기 있었는지
여자의 입장에서 여자가 알 수 있듯이
카이사르가 빚 문제도 유복한 지식인들이
알 수 없었을 거라 합니다.
빚을 많이 진 채무자일수록
빚을 얻기도 더 쉽다는 점이라는 것을
알면 해결됩니다.
카이사르의 최대 채권자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였습니다.
그 자신이 빌려준 돈도 막대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진 부채의 지불 보증까지 서주었으니
거의 유일한 대형 채권자라고 봐도 됩니다.
카이사르가 이처럼 크라수스에게
막대한 빚을 질 수 있었던 것은
빚이 소액일 때는 채권자가 강자이고
채무자는 약자이지만
액수가 늘어나면 이 관계가 역전된다는 점을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빚을 많이 지게 되면 '보증'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많능 빚은 채무자에게 골칫거리가 되기보다
오히려 채권자에게 골칫거리가 됩니다.
떼였다고 체념하기에는 액수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채권자는 채무자가 파산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지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카이사르는 빚을 잘 활용하였는데
그의 저서 <내전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저서에서 스스로를 3인칭으로 적습니다.)
카이사르는 대대장이나 백인대장들한테 돈을 빌려
병사들에게 보너스로 주었다
이것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왔다
지휘관들은 돈을 못 받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싸웠고,
총사령관의 선심에 감격한 병사들은 전심전력을 기울여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입니다.
그가 채권자에게 도리어 큰소리치면서 빌린 돈을
무엇에 사용했는지 보여주는데
그는 여자들한테 주는 선물 뿐만 아니라
공공 도로 보수나 검투사 시합 등 공적인 일에도
빚진 돈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일에 거림낌 없이 돈을 쓰면서도
개인 재산을 늘리는 데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무덤조차 갖지 않았으며
그의 정적들도 그의 부채를 시빗거리로 삼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 일에 돈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후세 연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남의 돈으로 혁명을 해냈다고
![](https://blog.kakaocdn.net/dn/dea3lC/btspcw1CMrC/csI0ELZPTSPue0xC5imKv1/img.jpg)
#카이사르 #돈 #여성 #스캔들 #천재
출처 : 시오노 나나미 저, 김석희 역, 로마인이야기, 한길사
'버티풀크라운 > 우디스 북클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챗GPT 질문이 돈이 되는 세상-AI의 현재와 미래- (0) | 2023.07.27 |
---|---|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 - 로마인 이야기4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유년기, 소년기- (0) | 2023.07.27 |
창업을 넘어 기업가가 되고 싶은 분들을 위한 교양 자기계발서 <사장학 개론> (0) | 2023.07.26 |
운이 좋은 권력자 술라, 공화정을 위해 시대를 거스르다(로마인이야기 3권 내용 요약) (0) | 2023.07.26 |
블로그 성공비법 <한 달 만에 블로그 일 방문자 수 1000명 만들기>를 읽고 (0) | 2023.05.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