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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마리우스(바티칸 미술관 소장) 출처 : 로마인이야기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로마가 아닌 아르피노에서 태어났다.
이곳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된 것은 기원전 188년이었는데
이는 가이우스가 태어나기 불과 30년 전의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마리우스는 프랑스 영토가 된 직후의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난 나폴레옹과 비슷했다.
가이우스는 지방 출신의 평민으로 출세를 위해 군인이 되는 길을 택한다.
보통 로마인들은 세 개의 이름을 갖는데 개인 이름(프라이노멘), 일족 이름(노멘), 가문 이름(코그노멘)의 세개이다.
가이우스는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있었고 이름만 봐도 그가 평민 출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름이 두 개밖에 없는 이 지방 출신자가 처음으로 주목을 받은 것도 에스파냐 누만티아의 전쟁터에서였다.
에스파냐 원주민의 반란에 애를 먹고 있던 로마는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당대 최고의 장군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누만티아 전선의 총사령관으로 파견했다. 그 때 총사령관 막사에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한 사람이 물었다.
"각하에 뒤이어 로마군을 이끌어갈 장군은 누가 될까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바로 옆자리에 있는 젊은 장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사람일 거요"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그해 나이 23세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기원전 132년 그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따라 로마로 개선했다.
그후 13년 동안 마리우스의 이름은 소문에도 오르내리지 않았다.
아마 각지의 군단을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있었으리라
기원전 119년, 그는 호민관에 취임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살해된 지 2년 뒤의 일이다.
나중에는 평민의 대변자로 주목받게 된 마리우스이지만
호민관 시절에는 지위와 권력을 조금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38세인 그에게 호민관 직책은 원로원 입장권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햇을 것이다.
그는 호민관 임기를 마친 후 안찰관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는 40세가 넘어서 결혼했는데 신부는 율리우스 일족에 속하는 카이사르 가문의 여자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에 해당한다.
당시 카이사르의 가문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류 집안이었기 때문에
이 혼인으로 마리우스의 처지가 달라졌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2년 뒤 기원전 115년에는 법무관에 출마하여 당선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속주 에스파냐 총독에 취임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그는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않는다.
마리우스는 이후 벌어진 유구르타 전쟁에 총사령관 메텔루스의 부장으로 아프리카에 파견되면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유구르타 전쟁에서 총사령관 메텔루스는 전력 감소를 피하기 위해
외교전을 통해서 주변 부족이 유구르타에게 등을 돌리게 하려고 애썼지만
유구르타의 인기가 워낙 높은 탓에 쉽지 않았다.
마리우스는 상관인 메텔루스에게 전략 변경을 요구했지만
메텔루스는 듣지 않았다.
총지휘권을 장악하지 않는 한 병사들도 자기도 아프리카 땅에서 꼼짝 못하게 될 거라고 판단한 마리우스는 집정관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을 높이 사서 마리우스를 부장으로 임명했지만
출신으로 보아 자기와 같은 반열에 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메텔루스는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집정관에 출마하기 위해 제대를 청한 마리우스에게 허가를 내주기를 꺼렸다.
그는 옆에 있던 20세의 아들을 바라보면서 마리우스를 빈정거렸다.
"집정관이 되고 싶다는 얘긴데, 설령 자네가 집정관이 될 수 있다 해도 저애와 비슷한 시기에 될 테니까 아직 시간은 충분하지 않은가"
평범한 시민도 법무관 정도는 될 수 있지만, 집정관까지는 어려웠던 것이 당시 로마의 실정이었다. 그래도 선거일을 열흘 앞두고 제대 허가를 내주기는 했다. 그는 서둘러 출발하여 나흘 만에 로마에 도착했고 민회가 개회되는 시간에 간신히 맞출 수 있었다.
당시 로마는 군사력 약화로 인해 곳곳에서의 전투에서 지고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마리우스에게 유리하게 작용해 지휘관 출신의 민회 신참자 마리우스를 기원전 107년의 집정관으로 선출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담당할 전선을 아프리카로 결정했다.
마리우스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는 교육도 받지 못했고 그럴만한 교양도 없었지만 직업군인으로서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그라쿠스 형제가 하지 못했던 질적-양적으로 떨어진 로마의 군대 개혁을 너무나 손쉽게 해낸다.
마리우스는 집정관의 권리인 정규 군단 편성을 기존의 징병제가 아니라 지원병 제도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로마의 병역은 시민의 의무가 아니라 선택에 따른 직업으로 바뀌었다.
마리우스의 호소에 응해 지원한 로마 시민들 대다수는 농지를 잃거나 하여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었다.
그라쿠스 형제 시기에는 실패했던 이 개헉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패배를 계속하는 로마의 군대를 개혁할 필요성을 원로원도 느끼고 있었다는 점
마리우스의 개혁은 농지개혁을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유층의 반발을 사지 않았다는 점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직업을 되찾은 전 실업자들한테 대단한 호평과 환영을 받았다는 점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체제 밖 개혁이었다면 마리우스의 개혁은 집정관으로서 한 체제 내 개혁이었다는 점이었다.
마리우스는 이 당시의 개혁으로 그동안 갖지 못했던 클리엔테스들을 가질 수 있었고
마리우스를 중심으로 민중파라고 불러도 좋은 당파가 형성되었다.
마리우스는 유구르타 전쟁을 조기 종결 시킬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마리우스의 임기가 끝나 버렸다.
마리우스는 민회에 요청해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절대 지휘권을 요청하였고
민회는 이를 승인했다.
전쟁 중 병사들과 똑같은 음식을 먹고, 진지를 만드는데 동참하고 전쟁터에서는 앞장서는 마리우스의 모습에
병사들이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인기는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여러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던 유구르타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외교적 재능이 필요했는데
마리우스는 그 재능이 부족했지만 그의 휘하에 로마의 주인공들 중 한 명이며 그러한 재능을 가진 회계감사관으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술라의 활약으로 유구르타가 체포되고
로마인들은 모든 것이 마리우스의 공적이라 믿고 그가 아직 아프리카에 있는데도 이듬해인 기원전 104년의 집정관으로 그를 선출했다.
민회가 출마하지도 않은 마리우스를 당선 시킨 것은 북쪽에서 내려오고 있는 야만족 문제를 마리우스가 해결해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104년 야만족들은 돌연 에스파냐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기원전 104년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가 된다.
마리우스는 이전에 실시한 개혁을 확립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마리우스의 개혁은 지원병제에 기반하고 있었고 이는 로마군의 사병화가 진행되는 부정적 결과도 낳게 된다. 이후 등장하는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같은 인물들은 마리우스의 개혁의 기반아래 등장하게 된다.
마리우스는 기원전 104년부터 다섯차례 연속으로 집정관에 선출된다.
그만큼 북쪽의 야만족 문제는 로마에게 골칫덩어리였고 원로원도 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기원전 103년 야만족이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 중서부 지역에 눌어 앉은 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마리우스는 병력의 약화를 막기 위해 론 강 어귀에 대운하 공사를 한다. 사회간접자본의 중요성을 알던 로마인들은 이때부터 어딘가에 주둔할 때는 그곳에서 토목공사를 벌이는 관습이 정착되었다.
기원전 102년에 마리우스는 네번째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야만족들과 본격적인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인구가 많았던 야만족들은 세 갈래로 나뉘어 남하했고 마리우스는 자신이 담당하는 구역에서 야만족들을 그대로 통과 시킨다. 야만족들은 로마군 병사들에게 로마에 도착하면 너희가 잘 있다고 안부를 전해주마고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야만족들이 다 통과한 후 마리우스는 후방에서 야만족들을 공격하여 승리한다. 이때 10만명이 넘는 게르만족이 죽거나 붙잡혀 전멸했다.
개선식을 치르기 위해 로마에 와있던 마리우스는 동료 집정관 카툴루스가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개선식을 연기하고 다시 전선에 나간다. 민회는 마리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기원전 101년의 집정관에 그를 선출한다. 그는 십만명이 넘는 적을 상대로 싸워 승리한다.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기원전 100년의 집정관으로 선출된다.
마리우스에게 통상 여섯번째였고, 기원전 104년부터 5년 동안 매년 계속해서 집정관에 선출된 것이다.
지방 출신의 인물이 건국 이래의 명문 귀족도 달성하지 못했던 지위와 영예로 빛났다
전쟁이 끝난 후 마리우스는 자신과 동거동락한 병사들의 퇴직 문제를 해결해야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정치력이 약했고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미온적 태도에 그의 인기는 나날이 사그라들어 갔다.
그때 호민관에 당선된 사트르니누스가 저소득층에게 곡물을 싸게 파는 곡물법을 발의하였고 마리우스는 이에 동조한다. 그리고 새롭게 건설된 식민지에 마리우스의 퇴역병들에게 토지를 주도록 법을 발의하였다.
그의 이런 법은 원로원의 반대에 부딪치지만 마리우스는 둘 사이를 중재하기보다 가장 앞장서서 원로원 선서를 하는등 사트르니누스를 지지해버린다. 그의 이런 태도에 그를 존경하던 원로원 의원들이 그에게서 돌아선다.
재선을 노리던 사트르니누스가 경쟁자를 죽이는 일이 발생했고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 권고를 의결한다.
원로원 최종 권고의 실행자는 집정관이되는데 그해 집정관은 마리우스였다.
마리우스가 자신의 편이라 생각한 사트르니누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지지자들을 소집하여 농성을 벌인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원로원 최종 권고의 모순을 밝힐 능력도 둘 사이를 중재할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농성중인 인원들을 강제 진압한다. 폭도들을 죽이지 않고 건물에 감금하나 반대파가 건물을 무너뜨려 사트르니누스 일파가 모두 죽게 된다. 마리우스는 이 무법행위를 저지하는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평민들은 마리우스에게 실망했고 마리우스는 다음해 집정관 선거를 포기해야할 처지가 된다.
이후 로마의 시민권 문제를 둘러싸고 로마의 동맹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동맹시 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은 로마의 시민권을 허락해주는 법률이 제정되고 나서야 진정되게 된다. 이 동맹시 전쟁에서 활약한 인물이 술라로 그는 로마가 동맹시 전쟁으로 혼란한 틈에 세력을 확장하려한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 6세를 정벌하기로 한다.
그런데, 마리우스가 술라가 미트라다테스 6세를 정벌하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고 술라는 로마시로 군대를 이끌고 와 마리우스를 쫓아내는데 성공한다. 마리우스는 집정관이 설마 수도로 군대를 이끌고 올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나머지 그대로 술라에게 당하게 된다.
기원전 87년 킨나라는 인물이 집정관에 당선된다. 그는 술라가 미트라다테스 왕을 정벌하기 위해 그리스로 떠난 사이 술라와의 약속을 깨고 술라가 행한 개혁들을 폐지하고 마리우스의 명예를 회복시켜준다. 그러자 동료 집정관 옥타비우스가 거부권을 발동했고 로마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난다. 킨나는 패배해 로마에서 달아났지만 정세변화를 탐지한 마리우스가 아프리카에서 6천 명의 병사와 귀국해 로마를 장악한다.
마리우스는 비참하고 굴욕적인 도피행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70세가 넘은 나이로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 그는 술라와 관련된 인물들을 모조리 죽이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기원전 86년 집정관에 선출되어 일곱번째 집정관이 된다. 하지만 그는 임기가 시작되고 13일째에 향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로마인 이야기,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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