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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풀크라운/우디스 북클럽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by 꾸깃쿠크 2023.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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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는 핑계로 하루 이틀 미루던 일들을 한 가지씩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활동으로 저 책 궁금한데?하고 호기심을 가졌다가 읽어야 하는데 읽어야 하는데 하면서 안 읽었던 책 읽기를 하기로 했다.

 

로마인 이야기는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작가님의 필력이 주는 흡입력에 많은 사람들이 읽은 베스트 셀러로 로마의 장구한 역사처럼 긴 내용으로 인해 읽어 볼 엄두를 못 내던 작품이다. 전체 15권으로 1권을 읽다가 포기 했던 경험이 있다.

 

이번에 1권을 완독하게 되면서 내용 정리 겸 블로그에 기록을 남겨 보고자 한다.

 

Rome was not built in a day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경구로 어떤 화려하고 거대한 것도 그 시작은 작았다라는 의미로 격려의 말 혹은 의지의 말 때로는 꾸준함을 강조하는 말로서 등등 여러 의미와 여러 상황에서 사용되어 온 말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이지만 로마가 대제국을 건설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대게 성공하고 나서의 업적은 대단하고 훌륭해서 눈이 가지만 시작은 초라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선이 덜가기도 하고 너무 먼 옛날이라 남아 있는 자료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기록할 도구도 변변치 않았을 것이고 많은 역사가 구전으로 전해지던 시기이고 당대의 기록들마저 지금에 와서는 분실이 많이 되어 후대의 역사가들이 구전과 당시에는 남아 있던 당대의 기록들을 참고하여 작성한 것들을 토대로 밖에 볼 수 없어 불확실한 면도 많아 잘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관심사에서 멀어질 수 있는 로마의 건국시기 이야기를 작가님은 부제를 통해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들인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통 우리는 성공을 그리며, 나중의 업적을 생각하며 이 경구를 많이 쓰는데 작가님은 반대로 1권의 부제로 이 경구를 쓰신 것이다. 성공한 로마를 알려면 이 시기를 알아야 한다는 말로 독자들을 설득하는 듯하다. 1권의 부제를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정한 작가님의 센스와 이러한 경구를 갖고 있는 로마에 대한 호기심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 책은 로마의 탄생부터 로마 공화정 초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많은 국가가 건국 신화를 갖듯이 로마는 자신의 뿌리를 트로이에서부터 찾는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가 그리스 연합군에게 함락 될때 일행과 함께 탈출한다. 로마 근처의 땅에 정착한 아이네이아스는 당시 그 땅의 왕의 사위가 되어 왕위에 오른다. 왕위는 그의 아들 아스카니오스에게 이어지고 그는 정착해 있던 땅을 떠나 알바롱가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

 

알바롱가는 로마의 모체가 된 도시인데 로마인이야기에서는 이후 왕들의 계보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작가님이 보기에 로마인이 거짓으로 꾸민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로마인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한 것은 로물루스이고, 그 로물루스는 트로이에서 도망쳐 나온 아이네이아스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리스와 교류하기 시작한 로마인들은 트로임 함락이 기원전 13세기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400여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꾸민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400년의 공백이 메꿔지고 기원전 8세기 알바롱가의 왕의 동생은 왕이 죽자 자신이 왕위에 오르고 전왕의 딸이 후사를 낳지 못하도록 무녀로 만든다. 그런데 왕녀가 강가에서 잠깐 잠든 사이 군신 마르스가 왕녀에게 반해 사랑을 나누고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태어나게 된다. 왕은 격분하여 왕녀는 감옥에 가두고 쌍둥이는 바구니에 담아 테베레 강에 띄워 보냈는데 바구니 안의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발견한 늑대가 젖을 주고 지나가던 양치기가 두 아이를 발견하면서 두 아이는 살아남게 된다.

 

장성한 두 아이는 알바롱가의 왕에게 복수를 성공하지만 알바롱가가 정착하기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훗날 로마가 될 땅에 정착한다. 향후 천년이 넘게 이어지는 로마제국의 시작이었다.

 

당시에는 큰 세력을 갖고 있는 두 세력이 있었는데 하나는 북쪽의 에트루리아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쪽의 그리스 인이었다. 그리고 이 둘 모두를 제치고 로마가 큰 세력을 자치한 것은 로마가 방어가 불완전한 곳에 도시를 건설한 덕분에 결과적으로 밖을 향해 발전하게 되었다고 본다.

 

에트루리아인은 방어에는 완벽하지만, 발전을 저해받기 쉬운 언덕을 좋아했고 이런 이유 때문에 로마의 땅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리스인은 통상에는 편리하지만, 자칫하면 적의 존재를 잊게 만드는 바닷가에 도시를 세웠고 마찬가지로 로마 땅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초기에 로마는 입지 선정덕분에 두 세력의 견제를 받지 않았고 뻗어 나갈 수 있었다.

 

건국왕 로물루스는 국정을 3개의 기관에 나누었는데 왕과 원로원과 민회였다. 특이한 점은 왕이 세습이 아니라 민회의 투표로 선출되었다는 점이다. 왕은 종교제의와 군사 및 정치의 최고 책임자이고 원로원은 100명의 장로들로 구성되어 실권없이 왕에게 조언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민회의 승인 없이 왕이 임명하였다. 민회는 왕과 정부 관리를 선출하였지만 정책을 입안할 권리는 없었고 정책을 승인할지 거부할지 정하는 권리를 갖고 있었다.

 

초창기 로마는 독신 남성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를 늘리기 위해 로물루스는 이민족의 여자를 강탈해야 했고 축제에 사비니족을 초대한다. 신에게 바치는 축제에 무기를 갖고 오는 것은 금지된 일이었고 로마인들은 축제에 참여한 사비니 족여자들을 강탈한다. 사비니족 남성들은 로마인에게 쫓겨 본국으로 돌아가고 강탈당한 여인들을 돌려달라고 전쟁을 일으킨다. 지속되는 전쟁 가운데 강탈당한 사비니족의 여인들이 남편과 가족들의 싸움을 만류하면셔 로마는 사비니족과 통합되었다고 한다. 이는 로마인들이 강탈한 사비니 족 여성들을 아내로서 제대로 대접하고 대우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한다. 이 사건은 후대의 역사학자,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많은 평가가 이루어졌다.

 

서양에서는 지금도 신랑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풍습이 있는데 이 사건 이후 전해 내려 온 것이라고 한다.

 

로마는 사비니족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주었으며, 원로원 의석을 제공하였다. 로마는 사비니족과 대등하게 통합되었고 왕도 두 명이 되나 전쟁 중 사비니 족의 왕이 죽으면서 로물루스만 남게 된다. 로물루스는 로마의 유명한 백인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로물루스는 군대 열병 중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번개가 치자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서로의 세력이 암살했다는 설도 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이 신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었다고 한다.

 

로물루스의 다음왕은 사비니족의 누마가 왕이 되었다.

 

이는 로마가 사비니족과 완전한 통합을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역사가 리비우스는 자신의 저서 [로마사]에서 누마의 업적을 소개 할 때, 왕위에 오른 누마는 법과 풍습을 개선하여, 그때까지 폭력과 전쟁으로 기초를 쌓은 로마에 건전함을 주고자 했다고 평했다.

 

누마는 재위기간 동안 전쟁없이 내치와 행정에 집중하였고 시민들을 각종 직능별로 구분하고, 달력을 개혁했으며, 종교를 개혁했고 신관 조직을 정비했다. 로마의 신관들은 전임 신관이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의 로마사람들은 신관이 입는 토가를 걸치고 자주 혼자 숲속에 틀어박힌 누마를 보며 누마가 님프들을 통해 신과 소통한다고 여겼고 누마는 43년 동안 로마를 다스린 뒤, 님프들의 마중을 받으며 평온하게 저세상으로 떠났다

 

누마가 죽은 뒤 3대 왕으로는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라는 인물이 선출된다.

 

툴루스 왕은 라틴족의 발상지로서 로마인에게는 선조의 땅이기도 한 알바롱가를 공격해 차지한다. 이때, 알바롱가의 사람들은 로마로 강제이주 당하지만 로마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게 된다. 퀴틸리우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같은 알바롱가의 유력한 가문들이 로마 귀족이 되었고 대표자에게는 원로원 의석이 제공되었다. 율리우스가문에서 나중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난다.

 

툴루스 왕은 32년간 로마를 통치하고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로마의 4대왕은 안쿠스 마르티우스이다.

 

누마의 외손자인 그는 주변에 남아 있는 사비니족과 라틴족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는 25년 동안 재위했는데 재위기간 동안 몇 가지 사업을 완수했다.

첫째, 테베레 강에 처음으로 다리를 놓았다. 두번째, 테베레 강 어귀에 있는 오스티아를 정복했다. 오스티아 정복으로 로마는 지중해를 마주보게 되었고 염전 사업을 손에 넣게 된다.

 

로마의 5대왕은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이다.

 

그는 안쿠스가 왕위에 있을 때 이주한 에트루리아인이었다. 혼혈이었던 타르퀴니우스는 폐쇅적인 에트루리아 사회에서 성공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로마로 이주해 왔다.

 

타르퀴니우스는 최초로 선거운동을 한 로마인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로마 전역에서 연설을 하고, 자기한테 표를 던져달라고 시민들을 설득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타르퀴니우스는 37년간 재위했는데 그는 재위기간 동안 원로원 의석을 200명으로 늘리고 그는 로마의 일곱 언덕들 사이에 있던 습지대를 개발한다. 지하수로를 공사하고 배수구를 만들었으며 지하수로 위를 돌로 포장하였는데 훗날 이곳 들 중 하나가 로마의 심장부라고 부르게 되는 '포룸 로마노', 혹은 '포로 로마노'가 된다. 그는 치세기간 동안 인기가 날로 높아졌으며 세르비우스라는 인물을 사위로 맞아 총애한다. 왕이 되고자 했던 선왕 안쿠스의 두 아들들은 세르비우스가 타르퀴니우스의 추천을 받아 왕이 될까봐 타르퀴니우스를 암살하는데 타르퀴니우스의 부인이 세르비우스에게 어서 왕위에 오르라고 알려주면서 세르비우스는 원로원 결의만으로 왕위에 오른다.

 

그렇게 로마의 6대 왕은 민회의 선출 없이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즉위한다.

 

로마의 6대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로마 전체를 에워싸는 성벽을 건설하고 세제를 개편한다. 투표권을 가진 시민이 병역의 의무를 짐으로써 세금을 냈던 고대를 생각했을 때 세제 개편은 군제 개편이었으며 선거제도 개편이었다. 그는 로마 최초로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는 44년 동안 로마를 다스린다.

 

세르비우스는 자신의 두 딸을 선왕 타르퀴니우스의 아들들과 결혼 시켰는데 서로 성격이 다른 사람들끼리 결혼 시켰다. 서로가 서로의 성격을 중화시키길 기대했던 세르비우스의 생각은 최악의 결과를 낳는데 성미가 드센 왕녀가 성격이 온순한 남편을 사사건건 무시하였고 자신과 성격이 비슷한 제부를 유혹한다. 그런데 성격이 온순한 두 사람이 급사하는 일이 발생하고 성격이 드센 두사람은 재혼한다. 이 왕녀는 자신의 남편 타르퀴니우스에게 왕이 되라고 부추겼고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기 시작한다.

 

그는 원로원에서 세르비우스를 모함하고 폐위시킬 것을 촉구했고 이 소식을 듣고 온 세르비우스를 원로원에서 쫓아냈을 뿐만 아니라 암살자를 시켜 암살을 시도한다. 이 암살은 실패하지만 세르비우스는 자신의 딸 툴리아가 모는 마차가 덮쳐 죽게 된다.

 

그렇게 로마의 7대왕으로 5대왕의 아들 거만한 타르퀴니우스가 즉위한다.

 

7대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는 세르비우스의 장례를 금지하고 선왕파 원로원 의원들을 모두 죽인다. 그는 민회의 선거도 원로원의 승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오른다. 그후에도 줄곧 그는 원로원에 조언을 청하지도 않았고, 민회에 찬반을 묻지도 않았다. 시민들은 그를 뒤에서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라고 불렀다. 타르퀴니우스에게는 섹스투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섹스투스는 친척인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짝사랑했다. 결국 섹스투스는 루크레티아를 강간하고 루크레티아는 로마에 있는 아버지 루크레티우스와 전쟁터에 있던 남편 콜라티누스에게 편지를 보낸다. 루크레티우스는 발레리우스와 콜라티누스는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함께 달려왔고 루크레티아는 자신에게 생긴 일을 얘기하고 자결한다.

 

루크레티아의 유해는 로마로 운반되어 '포로 로마노'의 연설대에 안치되었다. 브루투스는 이런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며 왕과 그의 일가를 로마에서 추방하자고 제안한다. 브루투스의 의견에 찬성한 민중은 민병대를 결성한다. 전쟁터에 있던 타르퀴니우스는 급하게 로마로 돌아오지만 굳게 닫힌 성벽 앞에서 추방되었다는 통고를 받는다. 그는 에트루리아로 망명한다.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의 치세 25년만에 로마의 왕정은 끝나고 임기가 1년인 2명의 집정관이 통치하는 공화정이 시작된다.

 

왕정을 회복하려는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와 몇 차례 전투가 이어지지만 로마는 공화정을 정착시킨다. 로마의 공화정 시기는 민권이 점차 강화되어가며 우리가 역사에서 배웠던 12표법, 리키니우스 법등이 제정된다. 그러면서 로마는 전쟁을 계속 치르는데 산악 민족 삼니움족과 켈트 족의 침입으로 고생한다. 삼니움족은 산악 지형으로 인해 로마가 공격한 전쟁에서 고생했다면 켈트족은 도시 로마를 점령해서 로마에게 큰 타격을 입힌다.

 

이 켈트족이 로마어로 갈리아인이다.

 

갈리아인들의 공격에서 회복한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에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를 공략한다. 이 때 병법의 천재라 불리는 피로스왕과 전투를 치르는데 로마는 이마저도 승리한다.

 

로마는 북쪽에 갈리아인이라는 위험 요소가 남아있긴 했지만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통일하게 된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할 수 있었던 요소로는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 로마는 패장을 벌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진 패장을 죽이거나 벌을 주는 다른 민족과 나라들과 다르게 로마는 패장이 진 이유를 가장 잘안다고 생각하여 다시 전투에 임하게 하였다. 둘째, 로마는 패전국에 관대했으며 로마 내의 모든 관직과 시민권을 개방하였다. 로마는 주변의 민족들을 복속시켜 가면서 흡수하기보다 라틴동맹이라는 동맹을 맺는데 로마로의 이주를 원할 경우 로마 시민들과 동등한 권리를 주었다. 이러한 개방적인 로마의 태도는 로마의 발전에도 기여했을 뿐 아니라(이민족 출신의 왕들이 즉위하거나 훌륭한 집정관들이 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데 일조한다.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동맹국이 아닌 식민지가 등장한다.)

 

 

 

출처 :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로마인이야기,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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