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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이야기를 통해 본 로마사-승자의 혼미-

by 꾸깃쿠크 2023.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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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자에게는 성공했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가 따라다니는 법이다.

로마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라쿠스 형제 시대부터 시작된 로마의 혼미는

그들의 사치나 퇴폐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

이것이 그들 입가에 머물던 우수의 정체며 고뇌였다.

 

포에니 전쟁에서 이기고 지중해의 패자가 된 로마는

이제는 승리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들을 처리해야 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로마의 혼미가 시작되는 시대 그라쿠스 형제가 등장한다.

 

그라쿠스형제는 서양 속담에서 소위 말하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외조부가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이고, 조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도 노예 군단을 이끌고 로마 방위의 최전선에서 한니발과 맞서 싸우다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전사한 용장이다.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실각시키기 위한 원로원 회의에서 용감하게 스키피오의 편을 든 사람이었고 스키피오는 이 행동에 감동하여 자신의 딸 코르넬리아를 형제의 아버지에게 시집보낸다.

코르넬리아는 카이사르의 어머니와 함께 로마에서 존경받는 어머니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그라쿠스 형제를 훌륭하게 키워낸다.

 

초기 로마 사람들은 도시의 인구를 늘리고 확장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타민족에 대한 관대함과 개방성이 두드러진 사람들이었다.

 

통합한지 얼마 안된 사비니족의 사람을 두 번째 왕으로 세우기도 했고

전쟁에서 승리해도 상대 민족을 멸망시키지 않았고 자치권을 인정해줬다.

 

그리고 로마의 관대함과 개방성이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에는 군대의 강함도 한 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체제에 편입되길 거부한 민족들 혹은 로마에 반기를 든 민족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관대한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로마는 자신들의 연합을 확장시키고 지켜왔다.

 

전쟁에서 패했는데도 자치권을 빼앗기지도 않고 병력 제공의 의무정도만 지게 한다면 그 누가 그들을 배신하고 자치권을 빼앗길지도 모를 일을 선택하겠는가?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휘젓고 다니며 로마연합국가들의 연합 탈퇴를 기다렸던 시기에는 이러한 로마의 관대함과 개방성이 큰 효과를 발휘해 로마의 체제에서 카르타고의 체제로 들어가길 원하던 민족과 도시들이 없었고 로마는 이탈리아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로마의 군대가 포에니 전쟁 이후부터 약화되기 시작한다.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많은 면에서 변화하였는데 먼저 원로원에 신규자가 유입되지 않고 기존에 원로원 의원을 배출한 가문의 사람들이 원로원 의원이 되는 등 계급이 고착화되고 속주에서 들어오는 값싼 곡물들로 인해 빈부격차는 늘어나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소유해 병역의무를 지는 시민의 수가 점차 줄어들게 된다.

특히, 이 당시 속주로부터 값싼 밀이 들어오면서 이탈리아 내에서는 포도주나 올리브유 같은 작물들이 재배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작물은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드는 작물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재배하지 못해 재산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무산자는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았던 로마에서 유산계급의 감소는 로마 군사력의 약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 시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속주로 향하는 로마 장수는 정규군을 믿지 못해 사비로 모병을 해서 갈 정도였다.

 

그라쿠스 형제 중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에스파냐 속주의 전쟁을 진압하지 못하는 로마를 보며 로마의 위기를 직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평민의 관직 진출을 허용한 리키니우스 법과 평민의 입법권을 인정한 호르텐시우스 법에 의해 당시 호민관은 입법을 제의할 수 있는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라쿠스 형제 이전의 사람들은 호민관을 집정관에 선출되기 전까지의 과정으로 여기고 있어서 기존에 큰 역할을 하지 못했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호민관의 권한에 주목했고 호민관 재직시절에 많은 개혁안을 내놓는다.

 

티베리우스는 로마의 농지를 개혁하기 위해 농지법을 내놓는다.

국유지 임차의 상한선을 정하고 국유지 임차권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남는 국유지는 희망하는 농민에게 주었다.

 

그는 농민에서 무산자로 전락한 이들에게 농지라는 재산을 주고 자작농에 복귀시킴으로써 로마 시민층의 기반을 건전하게 하고 실업자를 구제하는 동시에 사회 불안을 해소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농민들에게 지원금을 국고에서 주고 부정 임차된 국유지를 회수하려던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의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원로원은 호민관 두 명 중 다른 한 명을 포섭해 티베리우스에게 반대하게 했고 티베리우스는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호민관을 해임시키기도 한다.

 

그는 부정 임차된 국유지를 반환하는 실무를 위해 3인 위원회를 설치하고 스스로 위원에 취임하여 다른 위원으로 장인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와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임명한다. 하지만 동생은 원주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에스파냐로 종군하였고 장인은 노환으로 병상에 자주 누웠다.

 

그는 혼자였지만 열정적으로 개혁을 주도했고 원로원과 자주 대립하였다. 그런데 호민관 선거일 티베리우스가 왕관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한 원로원 강경파들의 무력행동으로 인해 그를 따르는 사람들 300여명과 함께 티베리우스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동생 가이우스는 형의 죽음 이후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후에 호민관에 선출되고 형의 유작인 농지법과 3인 위원회를 부활 시킨다. 그는 로마의 빈민들을 위한 복지법으로 곡물법을 제정해 저소득층이 싼값에 밀을 구매할 수 있게 해주고 당시 투표권과 항소권을 갖는 로마 시민권을 개방한다. 동맹국의 시민인 라틴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의 취득을 인정하고 이탈리아인에게는 라틴 시민권 취득을 인정해 준 것이다.

가이우스의 지지자들이 늘어가는 가운데 원로원은 기득권을 지키고자 가이우스와 대립하기 시작한다. 원로원에서 여러 방법으로 가이우스를 방해하던 어느날 가이우스의 반대파 시민이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원로원은 이에 원로원 최종 권고(세나투스 콘술툼 울티눔) 의역하면 비상사태 선언을 로마 역사상 최초로 한다. 이는 반역자를 재판하지 않고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집정관에게 주는 것이었고 가이우스 일파는 얼마간의 대립 후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된다. 가이우스는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피신가지만 추적자들에 의해 로마 근교 숲속에서 노예와 함께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두 형제의 죽음으로 끝나게 되고 로마는 몇몇 미봉책에 가까운 조치들을 통해 로마 내부 문제와 국방의 문제들을 해결한다.

 

로마는 시민들이 병역의 의무를 지내던 체제를 버리고 돈을 주고 병사들을 고용하기 시작한다. 이는 무산자들의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직업군인들을 만들어 냈지만 전쟁이 끝나면 다시 실업자가 되는 미봉책이었고 이때부터 로마 정규군의 사병화가 이어지게 된다.

 

로마 건국 초기 강점이었던 개방성과 관대함은 승자의 혼미 시기에 없어지기 시작한다.

원로원 의원들이 이탈리아 내의 다른 도시의 시민들이 로마 시민이 되는 것을 거부하였던 것이 대표적인 모습이다.

 

그라쿠스 형제와 몇몇의 개혁자들이 있었지만 원로원의 반대에 번번히 실패하고 결국 보수주의자였던 술라가 독재관에 임명되어 이전 체제로 복귀하게 된다.

 

술라는 호민관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원로원의 의석 수를 늘리는 등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시킨다. 술라는 호민관이 재선되려면 10년의 간격을 두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고 호민관 경력자는 다른 관직에 선출될 수 없다고 규정안 법안을 성립시킨다. 이로서 그는 출세를 위해 호민관에 관심을 갖던 사람들의 관심을 호민관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라쿠스 형제들처럼 호민관으로서 개혁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지 못하도록 한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었고 술라가 만들어낸 체제는 술라 사후 몇 년이 안되어 흔히 술라파라고 알려져 있던 폼페이우스에 의해 많은 부분 사라지게 된다.

 

군대가 약체화 된 로마에 있던 몇 안되는 뛰어난 지휘관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전쟁의 승리를 통해 얻은 힘으로 큰 권력을 누린다. 그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에스파냐 속주의 반란을 집압한 뒤 자친 해체해야 하는 군대를 유지하였고 휘하의 군대로 로마시를 포위하기까지 한다.

 

폼페이우스는 위대한을 뜻하는 마그누스를 사용하며 자신의 위업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는 역사의 위대한 개인이 되지는 못한다.

 

역사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은 폼페이우스가 활약할 당시에 아직 그렇게 큰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던 카이사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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