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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본 로마사 - 로마인 이야기 2권 한니발 전쟁-

by 꾸깃쿠크 2023.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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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로마인이야기2
저자
시오노 나나미
출판사
한길사

 


2권은 포에니 전쟁 시기의 로마를 다루고 있습니다.

 

포에니 전쟁은 3차에 걸쳐 진행되는데 이 전쟁의 결과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2차까지만 다루고자 합니다)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 섬의 메시나가

시칠리아의 최강국인 시라쿠사의 공격을 받자

로마에 원군을 요청한 것이 발단이 되어 발발합니다.

 

메시나를 가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야 했고

메시나는 로마의 동맹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메시나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주저하게 됩니다.

 

하지만 로마가 지원을 거절할 경우

메시나는 당시 시칠리아의 서부를 장악하고 있던

카르타고에게 지원을 요청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칠리아의 대부분이 카르타고의 영향권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로마가 카르타고와 바다를 두고 맞닿게 된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출처 로마인이야기

 

결국 로마는 지원을 결정하고

로마의 집정권 한 명이 이끄는 두 개 군단을 파견합니다.

 

저자는 파견 규모를 보고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가 카르타고와

격돌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라고 얘기합니다.

 

메시나에 무사히 도착한 로마의 집정관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의 파병이 정당성을 얻을 수 있게 바로 메시나와 동맹을 체결합니다.

 

그런데 메시나가 로마와 동맹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오랜 적대관계였던 시라쿠사와 카르타고가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고 메시나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집정관 클라우디우스는 바로 시라쿠사의 공격을 격퇴하고

카르타고의 본대가 아니라 시칠리아의 수비군이었던 카르타고 군도 이깁니다.

그는 기세를 몰아 바로 시라쿠사의 수도로 쳐들어가나

겨울이 되어 강제 휴전기에 접어들고

임기 1년인 집정관의 임기도 끝나게 됩니다.

 

다음해 새로 집정관을 선출한 로마는 시칠리아 전선에 집정관 둘을 모두 파견하기로 정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해에 집정관으로 선출된

오타틸리우스 크라수스는 삼니움족 출신의 평민었다는 것입니다.

삼니움족은 로마가 40년동안 사투를 벌인 상대인데 로마는 삼니움족이 로마 연합의 일원이 된지

불과 20년만에 삼니움족 출신을 지도자로 뽑은 것입니다.

이러한 로마의 개방성과 포용성은 포에니 전쟁에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시라쿠사가 로마와 싸우는 동안 카르타고가 어부지리를 얻게 될 것이 걱정된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은 로마에 강화 사절을 보냅니다.

 

로마는 항복한 상대에게 제시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고

시라쿠사는 완전한 자치권과 독립을 유지한채 병력을 제공할 의무도 부가되지 않고

약간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전쟁을 끝내게 됩니다.

이후 시라쿠사는 참주 히에론이 살아있는 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히에론이 죽고 시라쿠사는 로마와 싸우게 되는데 이때 아르키메데스가 만든 병기의 활약으로 인해 로마는 고전합니다. 아르키메데스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 로마군 병사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이탈리아 남부의 방어를 견고히 한다는 목적을 달성한

로마는 시칠리아에 있는 로마군을 감축하지만

시라쿠사가 로마편에 붙자 오히려 위기감을 느낀

카르타고가 본격적인 전쟁을 위해 4만 명의 병력을

시칠리아 남부의 도시 아그리젠토에 파견합니다.

 

당시 로마와 카르타고의 관계는 로마가 카르타고와 맺은 협약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선박의 기항에 대해 카르타고 쪽이 더 유리하게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공화정으로 이행 된지 얼마 안된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해상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조약을 맺은 것이었겠지만

사람들은 "카르타고의 허락이 없으면 로마인은 바다에서 손도 씻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아그리젠토에서의 싸움은 양쪽 모두 뛰어난 지휘관이 없어 고전하지만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이 로마를 지원해주면서 로마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했고

카르타고의 용병들이 도망가면서 로마의 승리로 끝납니다.

이때 로마는 아그리젠토를 약탈하고 2만 5천명이나 되는 주민을 노예로 만듭니다.

 

이때 로마의 행위로 인해 카르타고와 로마 둘 중 어디에 붙을지 저울질 하던 도시들이

카르타고에 붙는 결과를 낳습니다.

 

로마와 카르타고는 이 전쟁이 끝나려면

어느 한쪽이 시칠리아를 완전히 정복해야 한다생각했고

전면전을 준비합니다.

 

로마는 그동안 경외시 했던 해군력을 강화해 배를 만들지만

당시에 이미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카르타고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부족한 해전의 경험으로 인해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연신 패하고

어이없는 패배까지 맞이하지만

까마귀라고 불리는 장치를 개발하면서 점점 해전에서 승리하기 시작합니다.

 

까마귀는 항해 중에는 뱃머리와 가장 가까운 돛대에 로프로 고정되어 있는 일종의 잔교로

전투시 까마귀 끝에 붙여 놓은 날카로운 철제 갈고리가 낙하할 때의 힘으로 갑판에 꽂혀 고정되고

까마귀를 타고 적의 배에 오른 로마인들은 백병전으로 승부를 보았습니다.

 

까마귀는 훌륭하게 해전을 육전으로 바꾸어 주었고 로마는 이후 카르타고를 상대로 해전에서 이기게 됩니다.

출처 로마인 이야기

로마인들은 지중해서의 승전으로 아프리카 본토에 전진기지를 설치하는데 성공합니다.

 

겨울철이 찾아와 강제 휴전기를 맞이한 로마는 집정관 중 한 명을

다음 집정관 선출을 위한 민회를 소집하기 위해 불러들이는데

이때, 카르타고에서 고용한 용병대장 크산티포스가 로마 집정관 레굴루스를 도발하고

전공을 세우고 싶었던 레굴루스가 후임 집정관들이 도착하기 전에 전투를 받아들이면서

처참히 패배 하고 맙니다.

 

새롭게 도착한 두 명의 집정관들은 아프리카 전진기지에 남아있는 병력을 데리고

시칠리아로 철수 하지만 돌아가던 중에 태풍을 만나고 해운 경험이 짧은 로마 지휘관들의

잘못된 지시로 인해 최악의 해난 사고를 겪게 됩니다.

 

카르타고는 이때가 로마와 강화를 체결할 시기라고 생각한 나머지 크산티포스를 해고하고

돌아오는 것을 조건으로 포로가 된 레굴루스를 강화사절로 보냅니다.

 

그런데 레굴루스는 로마에 가서 강화가 아닌 끝까지 투쟁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명예를 중시하는 로마인인 레굴루스는 카르타고로 돌아가고

카르타고인들은 레굴루스를 동그란 바구니에 가두고

코끼리들이 축구공처럼 발로 차게 해 레굴루스를 처형합니다.

 

다음해 집정관으로는 로마가 해군을 가진 첫해 패배했던 스키피오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끝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할아버지)

가 임명되고 로마는 두 명의 집정관과 두 명의 전직 집정관으로 병력을 둘로 나누어

육로와 해로에 파견합니다.

 

집정관 스키피오는 패배한 장수이고

전직 집정관 두명은 이전에 일어난 해난사고의 책임자였지만

로마는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는 온정에서가 아니라

한 번 실수를 저지를 사람은 그 실수에서 틀림없이 교훈을 얻었으리라고

생각하여 다시 지휘를 맡기곤 했다고 합니다.

 

스키피오는 시칠리아 동쪽에 있던 도시 팔레르모를 어렵사리 항복시킵니다.

겨울철 자연 휴전기가 찾아오고 시민병이었던 로마군의 병력 교체를 위해

귀환하던 로마군이 폭풍우를 만나 다시금 해난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카르타고는 팔레르모를 되찾기 위해 공격을 가하고

당시 로마 집정관 메텔루스의 활약으로 카르타고는 2만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패하게 됩니다.

 

다음해 집정관에 선출 된 풀케르는

로마가 접근전에는 강하지만 해운기술이 약하다는 것을 파악한

카르타고 군의 지휘관의 거리를 유지한채 싸우는 작전에 의해 대패를 하게 됩니다.

 

전쟁은 이렇게 어느 한쪽이 승리를 거두면 다른 쪽도 승리를 거두면서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시민군을 편성해 전쟁을 하는 로마는 점차 인구가 줄고 있었던 반면

용병들로 전쟁을 하는 카르타고는 인구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국력은 점차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카르타고는 하밀카르 바르카(한니발의 아버지)라는 천재 장수를 시칠리아로 파견합니다.

카르타고 내부의 파벌 싸움으로 충분한 병력을 받지 못한 하밀카르는 시칠리아에서

게릴라전을 감행하였고 이로 인해 로마는 시칠리아의 완전한 함락이 늦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카르타고 내부의 파벌싸움이 진정되고 하밀카르를 지원하기 위한 부대가 파견됩니다.

그런데 카르타고는 원래 지중해 해상의 패권자였다는 자신감과 로마가 얼마전 해전에서

패했다는 사실 때문에 수송선단에 가까운 부대를 파견하였고

로마는 카르타고의 선박들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후 카르타고는 하밀카르로 하여금 로마와 강화를 맺도록 하고

로마는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의 영유권을 포기하는 것을 조건으로 강화를 체결합니다.

 

그렇게 1차 포에니 전쟁은 끝나게 됩니다.

 

2차 포에니 전쟁은 바르카 가문의 한니발이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면서 시작됩니다.

 

당시 카르타고는 아프리카 본토의 농업 생산량만으로도 엄청난 부를 쌓고 있었고

이베리아 반도를 바르카 가문이 개척해내면서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바르카 가문의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야심이 가득한 인물로

로마를 상대로 이기는 것을 꿈꿔왔고

로마를 이기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전쟁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중해 해상의 패권은 로마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무도 생각못한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바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 북쪽에서 로마로 쳐들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한니발은 이 말도 안되는 작전을 실행하였고 (알프스 까지의 이동시간을 제외하고)

알프스를 보름의 시간이 걸려 넘는데 성공합니다.

뒷날 한니발이 자신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땅에 내려선 시점에서

그의 병력은 보병 2만 명과 기병 6천 명, 합계 2만 6천명이었다고 합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데만 2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소모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은 시점과 비교하면 3만 3천명의 병력을 이동하는데 소모한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니발의 이 전략은 확실하게 로마의 허를 찔렀고

로마는 카르타고 본국을 견제하면서 북쪽의 한니발을 상대하게 됩니다.

 

한니발은 처음 출정한 병력의 상당분을 잃었지만 이탈리아에서 로마와 아직 적대 관계였던

갈리아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병력을 보강합니다.

 

또, 천재적인 지휘 능력을 보여주었던 한니발은 로마의 지휘관들과 싸우면 싸우는데로

승리를 거두었고 이에 한니발에게 동조하는 갈리아인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한니발이 처음부터 병력손실을 감안하고 알프스 산맥을 넘은 것은

이탈리아 본토 내에서 병력을 보강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전투에서 승리해 로마연합의 동맹을 약화시키고 로마를 배반한 로마의 전 동맹국들로부터

병력과 보급을 받을 계획을 세웠지만 로마 연합의 결속력은 한니발이 생각한 이상으로 강했고

그는 제대로 된 보급도 받지 못한 채 로마와 싸우게 됩니다.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은 번번히 실패하지만

한니발은 보급이 적은 상황에서도 대승을 반복해

칸나이 회전이라는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승기를 잡습니다.

 

로마인들은 전투에서 한니발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전면전이 아닌 장기전을 유도하였고 이는 한니발을 약화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이때 아직 25세라는 어린 나이였던 스키피오는 특례를 인정받아 지휘관이 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펼쳐지던 전선에서 활약해 한니발의 본거지였던 이베리 반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또, 그는 다시한번 특례를 인정받아 시칠리아에 파견되고

시칠리아에서 아프리카로 전선을 확장해 전진기지를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한니발이 로마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한 고착상태에서

본국의 위기를 맞은 카르타고는 로마에 강화를 제의하고

스키피오는 말도 안되게 파견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제의합니다.

(자치권 허용, 약간의 배상 정도)

 

결국, 카르타고 본국은 한니발에게 귀환 명령을 내리고

한니발은 카르타고 본국으로 귀환합니다.

 

하지만, 교섭 과정에서 결국 강화는 결렬되고

한니발과 스키피오는 자마에서 전투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스키피오가 승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마 전투를 마지막으로 2차 포에니 전쟁은 끝이 나게 됩니다.

 

붙임성있고 개방적이어서 적까지도 그를 만나면 반해버렸다는 스키피오와는 반대로

한니발한테서는 마음을 툭 터놓고 상대를 대하는 느낌은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이탈리아에서 고립되었을 때 그를 떠난 병사는 없었다고 합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엄격한 태도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남자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독립된 동맹국으로 간주하고, 카르타고 국내의 자치권을 존중하고, 카르타고 영토 안에 로마 기지도 두지 않으며, 군대도 주둔시키지 않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카르타고 영토였던 아프리카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완전히 인정한다라는 내용이 들어간 조약을 체결합니다.

 

도저히 승전국이 맺었다고는 볼 수 없는 관대한 조약으로 로마의 승인 없이는 카르타고가 전쟁을 하지 못한다는 등 몇 가지 불평등 조항이 있기는 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것이 카르타고인 한니발이며, 로마의 장수 스키피오를 포함한 로마인 대다수가 아버지 혹은 가족이 전쟁 중에 죽었음에도 이런 조약을 맺었다는 것은 현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놀라울 수 밖에 없습니다.

 

로마인들은 2차 포에니 전쟁을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2차 포에니 전쟁당시 활약한 카르타고군의 장수 한니발에 대한 경외를 담은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1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기원전 241년의 기간 동안 진행되었고

2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19년~기원전 201년의 기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1차 포에니 전쟁에 참여한 장수들의 아들들이

2차 포에니 전쟁의 주역이 될 정도로

장기간 벌어진 전쟁이었으며

전쟁이 장기화 된 것에는

패자에 대한 로마의 관대한 처분과도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마의 관대함과 포용성은 사비니족 등 다른 부족을 통합하는데 기여해

초창기 로마가 크는데 큰 효력을 발휘하고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 연합의 이탈을 막아주어

전쟁의 승리에 기여하지만 동시에 포에니 전쟁시기부터 점차 로마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사작합니다.

 

포에니 전쟁이 끝난 이후에 로마 내부에서 카르타고에 대한 관대한 처분이

2차 포에니 전쟁을 불러왔다며 카르타고를 완전히 함락해야 한다는 주장이 카토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강해집니다.

 

그리스에서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를 완전히 이기고서도 자치를 허락해준 관대한 처분으로 인해

필리포스의 아들 페르세오스가 왕이 되자 다시 반란을 일으킵니다.

 

결국 로마는 마케도니아와 카르타고 둘 다 완전히 멸망시키고 맙니다.

 

이후 로마는 지중해 뿐 아니라, 아프리카 북부, 그리스 지역까지 패권하에 두게 됩니다.

 

시오노 나나미 저, 김석희 옮김, 로마인이야기,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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